DSM-5를 넘어서: 체크리스트 진단의 한계와 AI의 가능성
"당신은 우울증입니다" -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이번 팟캐스트의 호스트인 댄은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를 알아내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엉망진창(mess)"이었다고 표현합니다.
10년 동안 여러 치료사들을 만났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스스로 이것저것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내가 강박장애인 것 같아."
이 깨달음은 그에게 "매우 해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강박장애의 경우 일반적인 상담치료가 잘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강박장애라고 생각한 후, 노출 및 반응방지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치료사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고, 적절한 약물 치료를 받는 것도 "악몽 같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올바른 치료를 받고 나서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같은 증상, 다른 해석: 진단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
케이스 웨스턴 대학의 정신과 전문의 아와이스 아프탑 박사는 댄의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제 클리닉에서 가장 많이 오진되는 질환이 강박장애예요."
실제로 아프탑 박사가 만나는 환자 중 상당수가 수년간 다른 진단으로 치료받다가 뒤늦게 강박장애를 발견하는 경우입니다. 이상한 일이죠. 강박장애는 그렇게 드문 병도 아니고, 진단 기준도 명확한데 말입니다.
핵심은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었습니다.
강박장애 환자는 절대 "저는 강박사고가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무 불안해요..." - 의사가 불안의 원인을 자세히 탐색하지 않으면 일반적인 불안장애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계속 들어요..." - 그 생각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다른 정신질환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요..." - 증상의 패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강박사고의 특성을 놓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같은 강박사고라도 환자가 어떤 단어로 표현하느냐, 그리고 의사가 얼마나 깊이 탐색하느냐에 따라 진단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체크리스트의 함정: 왜 '직감'이 더 정확할까?
의료진은 DSM-5 진단기준을 기본 틀로 삼지만, 실제 진료에서는 훨씬 복잡한 판단을 합니다. 환자의 배경, 증상의 맥락, 치료 반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죠. 하지만 여전히 '객관적 기준'에 대한 압박이 존재합니다.
아프탑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임상가는 체크리스트 너머의 '직감'을 가져야 해요."
베테랑 의사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뭔가 이상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우울증 같지 않아." 이런 직감이 오히려 정확한 진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인공지능 발전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댄이 설명한 AI 연구의 역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초기 AI 연구자들은 문자 인식을 위해 'A'라는 글자를 어떻게 정의할지 고민했습니다. "A는 두 개의 선이 위에서 만나고, 가운데 가로선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규칙을 만들려고 했죠.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손글씨로 쓴 A, 기울어진 A, 일부가 지워진 A... 실제 세상의 A는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규칙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맥락과 변형이 무수히 많았던 것이죠.
성공한 것은 딥러닝이었습니다. 수천 개의 A 예시를 신경망에 학습시키면, 개별 뉴런은 "이게 A야"라고 알지 못하지만, 전체 네트워크가 협력해서 "여러 가지 가설을 동시에 테스트하면서 비규칙적인 방식으로" A인지 판단합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AI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기존 진단 체계를 완전히 넘어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AI에게 "이 사람이 특정 치료에 도움이 될지 예측해라"는 과제를 주면, AI는 강박장애나 우울증 같은 기존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자체적인 고차원 분류 체계를 만들어냅니다.
댄의 표현처럼, 이는 음악 장르와 비슷합니다. 록이 무엇인지 명확해 보이지만, 비스티 보이즈처럼 경계선에 있는 경우들이 많죠. 정신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류 시스템도 복잡한 현실의 한 조각만 보여줄 뿐이고, "이것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분류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AI는 이 문제를 수천 개 차원의 공간에서 해결합니다. 유사한 것들은 가깝게, 다른 것들은 멀리 배치하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카테고리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환자 정보를 AI에 입력하면, 마치 GPS가 현재 위치를 파악하듯 그 사람의 '심리적 위치'를 수천 개 차원의 공간에서 찾아내고,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접근법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제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목적입니다. 진단을 위한 분류인지, 치료 반응 예측을 위한 분류인지에 따라 AI는 완전히 다른 패턴을 찾을 것입니다. 댄이 10년간 헤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존 체계는 '정확한 라벨링'에 초점을 맞췄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치료가 도움이 될 것인가'였던 것이죠.
체크리스트를 넘어서: 과정과 네트워크
실제로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이미 이런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초진단적 접근(transdiagnostic approach)'은 진단 경계를 넘나드는 공통 메커니즘에 주목합니다. 예를 들어 불안장애, 우울증, 강박장애 모두에서 나타나는 '반추 사고 패턴'이나 '회피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과정기반치료(process-based therapy)'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네트워크 이론을 차용합니다. 개별 환자의 증상들을 독립된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로 파악하는 것이죠. 불면이 불안을 악화시키고, 불안이 다시 침투적 사고를 강화하고, 이것이 또 다른 증상들을 활성화시키는 식으로요. 치료는 이런 개별적 연결고리와 상호작용 패턴을 파악해서 변화시키는 것에 집중합니다.
댄의 경우라면 '강박장애 치료'가 아니라 '침투적 사고→불안→반복행동→일시적 안도→더 강한 침투적 사고'라는 그만의 악순환 네트워크를 끊는 것이 핵심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접근법들이 공유하는 핵심은 '고정된 범주보다는 동적인 과정과 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AI가 고차원 공간에서 패턴을 인식하는 방식과 일치합니다. AI도 미리 정해진 카테고리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데이터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관계와 패턴을 있는 그대로 학습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인간의 복잡성을 단순한 체크리스트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시도인 셈이죠.
본질은 없지만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유용한 '진단'
이런 새로운 접근법들이 드러내는 핵심적 통찰이 있습니다. 정신질환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라는 것입니다.
아프탭 박사는 강박장애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강박장애는 우리가 아는 한 '하나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증상 차원에서도 경계가 모호해요. 다른 불안장애들과 겹치고, 우울증과도 겹치고, 다른 질환들과도 겹칩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박장애를 강박장애로 만드는 단 하나의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요인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아프탭 박사의 설명입니다.
- 미영씨(28세)는 집에서 나가기 전에 가스밸브를 50번 확인합니다. 뇌 스캔 결과 전두엽-기저핵 회로에 이상이 보입니다.
- 진호씨(35세)는 더러워진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손을 씻습니다. 그런데 뇌 스캔은 정상입니다. 대신 어릴 때 강박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환경적 요인이 강합니다.
- 수진씨(42세)는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어 특정 행동을 반복합니다. 최근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후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강박장애' 진단을 받지만, 원인도 다르고 뇌 상태도 다르고 최적의 치료법도 다릅니다.
하지만 이런 이질성(heterogeneity)을 인정해야 한다고 아프탭 박사는 강조합니다. 동시에 강박장애라는 개념은 "일정한 기술적 잠재력"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식별할 수 있고, 치료 지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핵심적인 철학적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강박장애'는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아프탭 박사는 이를 '실용적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실용적으로는 매우 도움이 되는 개념의 좋은 예입니다. 실용적 관점에서는 존재하지만, 본질주의적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실체죠."
무슨 뜻일까요? 실용주의 철학은 "이것이 절대적 진실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벗어나 "이 개념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주목합니다. 실제 활용에 기반해서 이론적 관점이 제공하는 가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강박장애'라는 개념이 실용적으로 유용한 이유는:
-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 의사들이 공통 언어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 치료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 노출 및 반응방지 치료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연구가 가능해집니다 -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연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댄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그에게 '강박장애'라는 진단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그 진단이 올바른 치료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AI의 접근법과도 일맥상통합니다. AI도 "이것이 진짜 A인가?"보다는 "이것을 A로 분류하는 것이 주어진 과제에 도움이 되는가?"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1. 스스로를 관찰하고 기록하세요 댄처럼 자신의 증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탐색해보세요. "불안하다"에서 그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언제 시작되는지, 무엇을 할 때 완화되는지 기록해보세요.
2. 여러 의견을 구하세요 첫 번째 진단에 만족하지 마세요. 특히 치료 효과가 제한적이라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세요.
3. AI를 진료 준비 도구로 활용해보세요 아프탭 박사는 "AI가 평균적인 의사보다 더 꼼꼼한 임상 면접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AI가 의사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진료받기 전 자신의 증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도구로는 매우 유용합니다. ChatGPT나 Claude에게 증상을 설명해보고, 의사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미리 준비해보세요.
1. 환자의 첫 표현에 고정되지 마세요 "불안하다"고 말하는 환자에게도 강박장애 가능성을 열어두세요. 실제로 "언제부터 불안하셨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들이 드시나요? 그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특별히 하는 행동이 있나요?"와 같은 후속 질문들이 핵심입니다. 표면적 호소보다는 그 이면의 구체적 패턴을 탐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패턴 인식 능력을 체계적으로 키우세요 체크리스트도 중요하지만, "뭔가 다르다"는 직감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① 다양한 임상 경험 축적 ② 동료들과의 임상 사례 토론 ③ 치료 반응이 예상과 달랐던 사례들 재검토 ④ 지속적인 최신 연구 결과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특히 "전형적이지 않은" 임상 사례를 의도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해보세요.
3. 진단적 겸손함을 실천하세요 첫 진단에 확신이 서더라도 "이 진단이 맞다면 치료 반응이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는 가설적 접근을 유지하세요. 치료 반응이 예상과 다르면 즉시 재평가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두세요. 환자가 "뭔가 다른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 직감을 무시하지 말고 함께 탐색해보세요.
결국 중요한 것
댄의 이야기는 현대 정신의학이 AI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인간을 체크리스트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AI가 이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댄이 설명한 딥러닝의 혁명과 똑같은 일이 정신의학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별 뉴런이 'A'라는 글자의 규칙을 모르면서도 전체 네트워크가 완벽하게 A를 인식하듯이, AI는 명확한 진단 기준 없이도 환자의 복잡한 정신건강 패턴을 포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아프탭 박사가 지적했듯, 시간 제약 없이 증상의 미묘한 차이까지 탐색하는 AI 임상 면담은 지금 당장도 개발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거대한 데이터셋을 활용한 예측 모델도 이미 연구되고 있죠.
10년을 헤맨 댄이 결국 답을 찾았듯이, 정신의학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베테랑 임상가의 직감과 AI의 패턴 인식 능력이 만나는 지점에 있을 것입니다. 체크리스트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신의학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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