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연결'할 수 있을 뿐
OECD 자살률 1위라는 슬픈 타이틀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마지막 신호를 마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많은 분이 "우울증이 심하면 자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합니다. 우울하다고 해서 모두가 자살하지는 않으니까요.
오늘은 세계적인 자살 예방 심리학자 로리 오코너(Rory O'Connor) 교수의 이론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마음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법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오코너 교수는 그의 저서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 (원제: When It Is Darkes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살은 단순히 '죽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멈추고 싶다'는 절박함이다." (Suicide is not about wanting to die; it is about wanting the pain to stop.)
그 절박함이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가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 그 흐름을 끊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1. 패배감보다 위험한 것은 '갇혔다'는 느낌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패(Defeat)를 겪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연인과 헤어지거나, 빚을 질 수 있죠. 하지만 오코너 교수의 IMV 모델(통합적 동기-의지 모델)에 따르면, 실패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자살의 핵심 동기는 '속박감(Entrapment)'입니다.
한국 사회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재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실패했을 때 쉽게 "이제 끝이야", "더 이상 도망칠 구멍이 없어"라고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속박감입니다.
- 내적 속박: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에 갇힘.
- 외적 속박: 빚, 실직, 인간관계 등 상황에 갇힘.
💡 [실전 체크리스트] 지인이 단순히 "힘들다"고 말하는지, 아니면 "단절"을 말하는지 들어보세요.
- "어떻게 해도 상황은 안 바뀔 거야."
- "내가 사라지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이런 말은 우울을 넘어 '탈출구가 없다(No exit)'는 신호입니다. 이때가 바로 개입이 필요한 첫 번째 타이밍입니다.
2. 생각에서 행동으로 건너가는 '위험한 다리'를 끊으세요
오코너 이론의 백미는 여기입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과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살을 생각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공포를 뛰어넘게 만드는 촉진제, 즉 '의지적 조절 변인(Volitional Moderators)'들이 갖춰지면 생각은 순식간에 행동이 됩니다.
이것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 '끊어야 할 3가지 다리'로 정리했습니다.
① 첫 번째 다리: 충동성과 '술'
오코너 교수는 충동적인 성향이 자살 행동의 기폭제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기폭제는 바로 '술'입니다.
술은 전두엽을 마비시켜, 평소라면 "무서워서 못할" 행동을 "에라 모르겠다"며 저지르게 만듭니다.
- 실천 팁: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술 한잔하며 털어버려"라고 하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가 위험해 보인다면, 절대 혼자 술을 마시게 두지 마세요. 판단력이 흐려진 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② 두 번째 다리: 습득된 능력(Acquired Capability)과 자해
오코너 교수는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생긴 사람"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과거에 자해를 해봤거나, 신체적 폭력에 노출되었거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오래 참아온 사람은 고통에 무뎌져 있습니다. 이것을 '습득된 자살 잠재력'이라고 합니다.
- 실천 팁: 손목의 상처나 과거 자해 이력을 가볍게 넘기지 마세요. "관심 끌려고 저런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브레이크'가 닳아있는 상태입니다. 더 적극적인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③ 세 번째 다리: 수단에 대한 접근성
가장 물리적이고, 가장 확실하게 끊을 수 있는 다리입니다. 오코너 교수는 연구를 통해 "수단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충동적인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입증했습니다. 사람은 특정 방법이 막히면 즉시 다른 방법을 찾기보다, 잠시 주춤하며 '죽어야겠다'는 맹목적인 충동을 멈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 실천 팁:
- 약물: 처방받은 약을 한꺼번에 모아두지 못하게 관리해 주세요.
- 장소: 고층 아파트 베란다나 옥상 등 위험한 장소에 혼자 머물지 않게 하세요.
- 물건: 번개탄, 칼 등 위험한 도구를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치우세요.
전문가들은 6단계에 걸친 정교한 '안전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자칫 섣불리 계획을 세우려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죠.
오코너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일반인에게 권하는 역할은 '치료자'가 아니라 '다리(Bridge)'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위태로워 보인다면, 딱 3가지만 기억하세요.
- 직접적으로 물어보세요: "혹시 자살을 생각하고 있니?"
- 많은 분이 "괜히 물어봤다가 자살 충동을 부추기면 어쩌지?"라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직접적인 질문은 "내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안도감을 줍니다.
- 판단 없이 들어주세요: "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몰라줘서 미안해."
-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지 마세요. "힘내", "다 잘 될 거야" 같은 말보다, 그저 그 사람의 고통을 인정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스트레스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변화든 나쁜 변화든, 당사자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일 수 있습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그 정도 일로 뭘 그래"라고 상대의 고통을 평가절하하지 마세요.
- 전문가에게 연결해 주세요: "혼자 감당하기 힘들면 같이 병원에 가볼까?"
- 여러분의 역할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119 구급대원처럼,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까지 안전하게 이송하는 것입니다. 24시간 상담 전화(109)를 함께 걸어주거나, 병원까지 동행해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구조입니다.
4. 전문가를 위한 제언: 위기 개입의 SAFER-R 모델
혹시 상담이나 정신건강 분야에 계신 전문가라면, 조지 에벌리(George Everly) 박사가 개발한 SAFER-R 모델을 기억해 주세요. 자살 위험성이 높은 내담자는 "저 사람이 나를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도움받으러 온 게 시간 낭비 아닐까?"라는 깊은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안정화 (Stabilization):
- 가장 먼저 할 일은 '심리적 비상벨'을 끄는 것입니다. 내담자가 극도의 흥분 상태라면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 구체적 행동:
- 안전 확보: 당장 자해 도구가 주변에 있다면 치우거나,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세요.
- 기본 욕구 해결: "물 한 잔 드릴까요?"와 같은 작은 배려가 신경계를 진정시킵니다.
- 그라운딩(Grounding): 내담자가 공황 상태라면 "지금 발이 땅에 닿아있는 느낌에 집중해 보세요"라고 유도하여 현실로 돌아오게 돕습니다.
- 위기 인정하기 (Acknowledgement):
- 단순한 이해를 넘어, 그들의 위기를 '인정'해 주세요. "당신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싶고, 잘못될까 봐 걱정됩니다"라는 마음을 전달하며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도록 허용하세요.
- 이해 촉진하기 (Facilitation of understanding):
- "누구라도 당신 상황이라면 이렇게 힘들었을 거예요." 내담자의 고통을 정상화(Normalization)해 주세요. 자기 비난에 빠진 그들에게 "당신 탓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큰 위로가 됩니다.
- 효과적인 대처 권장하기 (Encourage effectiveness coping):
- "이전에 힘들었을 때는 어떻게 버티셨나요?" 과거의 성공적인 대처 경험을 상기시켜 주세요. 스스로 통제감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 핵심입니다.
- 회복 및 연계 (Recovery/Referral):
"뉴런도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기 위해 분투하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따라서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지 못한 뉴런은 기력을 잃고 결국 사멸하게 된다. 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가장 가까운 사람과 애착관계를 맺지 못하면 뉴런처럼 활력을 잃고 죽음에 이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그 사람의 믿음에, "아직 곁에 누군가 있다"는 작은 균열을 내는 것. 그리고 위험한 다리를 하나씩 끊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구조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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