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릿으로 유명한 엔젤라 덕워스의 신간 『시추에이티드』가 나왔습니다. 그릿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상황이나 구조적 불평등을 간과한다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신간은 상황적 요인이 한 사람에게 갖는 영향력을 다룹니다. 덕워스는 그릿과 상황적 요인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과 감정이 바뀐다는 것이 인지치료의 주요 가정입니다. 하지만 행동주의자들은 환경을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고 볼 것 같고, 굳이 구분하자면 저는 행동주의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지속적으로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은 제가 의지가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제가 동료 선생님과 하는 유튜브는 책을 꾸준히 읽기 위한 환경 설계의 일환입니다. 유튜브에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에 한 달에 최소 두 권은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공부도 단톡방에서 인증하는 방식으로 2019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 왔고 그 기록을 블로그에 남겨 왔습니다. 운동은 주로 X에 인증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개인 SNS에 운동기록을 남기다 보면 SNS에 인증하기 위해 마지못해 운동을 하게 되는 날도 분명 있습니다. 본말전도 같지만 건강이라는 목표 달성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유튜브 에피소드에서 덕워스는 하버드를 졸업하고도 진로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던 때 심리학을 만나서 박사 과정에 입학하게 된 일화를 말하면서, 10년간 이 분야의 공부를 그만두지 못하게 붙잡아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덕워스조차도 의지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에피소드 같습니다. 의지력을 안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설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게 지속이 어렵게 느껴지는 게 글쓰기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은 늘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글을 꾸준히 쓰는 것이 어려웠고, 사실 이 뉴스레터도 글을 꾸준히 쓰고자 하는 저의 환경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마감 하루 이틀 전에 글을 부랴부랴 써 내려가지만 뉴스레터가 없었다면 한 달에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에 한 분 한 분의 구독자께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3년 넘는 시간 동안 구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주 간격으로 두 편의 글을 쓰는 것이 제게 강력한 환경 설계가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전에 요즘 마음 사전 유튜브 채널에서 다루었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에서와 같이 상황을 변화시키는 주도성도 결국 다시금 상황적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있기는 한 걸까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뉴스레터 지속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의 주도성 발휘가 허구에 가깝다고 인정한 채 상황적 요인에만 너무 많은 비중을 두게 되면 자신의 삶에 보탬이 안 되는 자기합리화나 더 나아가 무기력을 초래할 여지도 있습니다.
상황적 요인에 더해, 그릿으로 표현되는 내적 자원이 결합되어 삶을 형성해 나간다고 보는 것이 건강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덕워스는 삶을 단 한 번의 붓질로 수정이 불가능한 수채화가 아닌, 덧칠을 통해 언제든 새로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유화(Oil Painting)로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상황적 주도성(Situational Agency)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자기 상황을 주도적으로 다루는 것, 즉 나의 최선을 끌어내는 사람들과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덕워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황적 책임(Situational Responsibility)을 말합니다. 스스로 상황을 바꿀 힘이 적은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앞서 품었던 의문, 즉 상황을 바꿀 여력조차 없는 사람에게 주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덕워스의 답으로 읽힙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도움이라는 것이죠. 그릿이 구조적 불평등을 간과한다는 비판에 대해, 이번 책은 그렇게 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잔향 심리학 뉴스레터 | 발신자: 오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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