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왜 여전히 '기록'해야 하는가
AI가 순식간에 수천 자의 글을 생성하고, 검색 한 번이면 원하는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굳이 내가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AI가 정보를 대신 처리해주는 이 시대야말로 '나만의 기록'이 더 절실해졌습니다.
오늘은 기록이 단순한 정보 저장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도구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마음이 복잡할 때, 일단 써보세요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말로 바꿔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됐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심리적 거리두기(psychological distancing)'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적는 순간, 우리는 그것과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게 됩니다. 마치 광각 렌즈로 상황을 바라보듯, 확대된 감정에서 한 발 물러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친 걱정과 후회는 깊은 수렁과도 같아서 한 번 끌려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돕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AI가 대신 글을 써줄 수는 있어도, 내 마음속 혼란을 직접 꺼내어 바라보는 행위는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쓴 것들이 쌓이면 '나'가 보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탐험은 자기 밖에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대부분은 붙잡기도 전에 사라지죠. 그런데 그 순간의 생각들을 짧게라도 적어두면, 나중에 다시 꺼내볼 수 있습니다. 며칠, 몇 주 전의 메모들을 천천히 읽어보세요. 그때그때는 흩어진 조각 같았던 생각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나'입니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해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 기록들을 분석해서 내가 미처 몰랐던 패턴을 찾아줄 수도 있죠. "당신은 이런 주제에 자주 끌리네요", "이 시기에 비슷한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꼈어요"라고 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패턴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몫입니다. 기록은 AI가 분석할 원재료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분석 결과를 해석하고 내 삶에 통합하는 성찰의 기반이 됩니다.
3. 남의 기준이 아닌, 내 이야기를 쓰는 일
소셜미디어 시대의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공유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부추김을 받습니다. '좋아요' 수에 따라 내 경험의 가치가 결정되는 듯한 느낌, 타인의 시선으로 내 삶을 평가하게 되는 순간들.
기록은 이 외부 의존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기록은 내가 겪은 경험을 견고하게 쌓는 과정이에요. 무수히 쌓인 경험은 삶의 방향성과 개성을 만들게 됩니다. 그럼 남들의 인생을 따라 하지 않고 '나다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죠."
결국 기록이란, 타인이 정해준 삶의 각본에서 벗어나 나만의 이야기 구조를 다시 짜는 일입니다. 쓰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해석하는 주체'로 재위치시킵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그 경험의 의미가 달라지죠. 기록은 내 경험을 내 언어로 정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씩 쌓인 정의들이 모여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4. 기록은 연결성이 강해질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티아고 포르테는 '세컨드 브레인'이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개인의 메모 컬렉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고 복리로 불어나는 지식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말하고 쓴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친다. 기록으로 남긴 것들은 하나의 노드가 되어, 많은 것이 실시간으로 스쳐 지나가는 지금의 세상에서 다른 무엇들과 연결될 기회를 만든다. 그리고 기록이 쌓일수록 연결의 기회도 다양해진다."
AI와 협업할 때 기록의 가치는 더욱 빛납니다. 오랜 시간 쌓아온 나만의 아이디어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면, AI는 그것을 바탕으로 의외의 연결점을 찾아주고 새로운 통찰을 제안해줄 수 있습니다. 기록이 많을수록, AI와의 협업도 더 풍성해집니다.
5. 힘들 때, 과거의 내가 나를 붙잡아줍니다
"돌이켜 보니 그 기록들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깊은 수렁에서 나를 조금씩 끌어낸 것이다. 일기에 한바탕 마음을 풀어 놓으면 조금 힘을 낼 수 있었고, 묵상을 기록하며 현실 너머의 미래를 보려고 노력했다."
기록의 루틴이 잡힌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기록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연결시키는 적극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기록을 보며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를 확인하고, 오늘의 기록을 통해 '나는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를 점검합니다.
AI는 효율을 높여주지만,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기록은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해주는 나침반입니다.
마치며: 쓰는 순간,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이 됩니다
AI가 무엇이든 대신 해주는 시대,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기록입니다.
"기록은 목표 달성 여부를 체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내면의 변화, 예상치 못한 깨달음, 타인과의 교감에서 비롯된 작은 울림을 담는 그릇이다. 글쓰기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변화시키고, 마침내 해방시키는 가장 강력한 실천이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든 좋으니 한 줄이라도 적어보세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그 한 줄을 내가 알아주는 것, 거기서부터 나만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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