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AI를 활용하여 작성했습니다.
7회차 뉴스레터에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통념의 빈약한 근거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외상 후 성장을 다룬 종단 연구 122개를 메타 분석해 보니, 성장 경험이 사건의 긍정적·부정적 특성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이라크 파병 군인 연구에서는 파병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고 보고한 군인이 오히려 15개월 후 PTSD 증상을 더 많이 겪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소개하면서, 고난이 저절로 성장을 만든다는 믿음이 때로는 현실 부인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가 이렇게나 명확한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고통에 어떤 원인이나 목적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걸까요. 최근 케이트 보울러(Kate Bowler)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 질문의 실마리를 조금 찾은 것 같습니다.
보울러는 듀크대 신학대학원 교수이자 미국 종교사 학자입니다. 35세에 4기 대장암 진단을 받은 이후, 자기계발 문화가 고통 앞에 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해 온 인물입니다.
보울러에 따르면 자기계발은 단순한 실용적 지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에 관한 철학적·종교적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더 나은 당신을 위한 다섯 단계', '관계를 개선하는 법', '더 오래 사는 법'. 이런 how-to의 대전제는 인간에게 거의 무한한 통제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계를 밟고, 도구를 활용하고, 올바른 마인드셋을 갖추면 경제적 불평등이든 사회적 불평등이든 최소화할 수 있다는 믿음.
보울러는 이 믿음의 역사적 뿌리를 번영 신학(Prosperity Gospel)에서 찾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 급격한 도시화로 극도로 부유한 사람과 극도로 가난한 사람이 불과 몇 블록 사이에 공존하게 됩니다. 이 불평등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나는 그렇지 못한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촉발했고, 그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특정한 서사가 생겨납니다. 신은 당신에게 건강과 부와 행복을 주기를 원한다. 좋은 생각이 좋은 결과를 만든다. 성공은 운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다. 이러한 번영 신학의 핵심 명제들이 세속화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자기계발 장르가 되었다는 것이 보울러의 분석입니다.
이렇게 보면 침대맡에 쌓인 자기계발서들은 단순한 실용서가 아니라 일종의 세속 경전입니다. 노력하면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교리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자기계발의 종교적 전제가 가장 해로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고통 앞에 섰을 때입니다.
보울러는 고통에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강박을 '목적 괴물(purpose monster)'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 심각한 상실을 겪고 있을 때 주변에서 건네는 말들을 떠올려 보면 이 괴물의 얼굴이 보입니다. "다 이유가 있어." "이걸 통해 더 강해질 거야." "하나님의 뜻이 있으실 거야."
보울러는 이런 말이 의도와 달리 상실의 현실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지적합니다. 누군가 "거기에 교훈이 있어"라고 말할 때, 사실상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둘러봐, 다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압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상처는 상처입니다. 곧바로 성장이나 목적의 서사로 갈아타는 것은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빼앗는 일입니다.
이런 압력은 타인에게서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도 마치 의무처럼 '그래도 이 경험 덕분에 성장했어'라고 되뇌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말이 진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내면의 압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파도 의미를 찾아야 하고, 무너져도 곧 일어서야 하고, 쓰러져도 배운 것이 있어야 한다는 압력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지운 이 압력이 실제로 해로울 수 있음은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대로입니다. 고통에 성급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고통을 온전히 겪어 내며 내 안에 통합하는 과정을 건너뛰게 만듦으로써 더 큰 고통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 앞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전적으로 해로운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울러 자신도 의미의 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구분하는 것은 이유(reason)와 의미(meaning)입니다.
이유를 찾는 일은 과거를 향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것이 나에게 무슨 교훈을 주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고통에 원인과 목적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통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35세에 4기 암 진단을 받은 보울러가 '왜 나인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면 의미를 만드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향합니다. 이유는 없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보울러의 핵심 주장입니다.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서 "여기서 무엇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 이것은 일어난 일의 이유를 소급해서 찾는 일이 아니라, 남겨진 자리에서 앞을 향해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이유를 찾는 대신 이처럼 주체적으로 의미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유한하며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울러는 자기계발 서사의 가장 큰 적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끝없는 성장과 최적화를 약속하는 자기계발의 서사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우리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갑니다. 세상에 갓 발을 디딜 때도, 세상을 떠날 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기계발 서사는 연약함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 좋은 것이 한순간에 주어졌다가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자기계발이 종교라면, 그 종교의 최대 이단은 '나는 이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고백이 필요한 순간이 삶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보울러가 말하려는 것은 모든 고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자는 것입니다.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유 없는 고통 앞에서 느끼는 절망도 함께 품을 수 있을 만큼 감정의 폭이 넓어질 때, 오히려 삶의 계절을 더 잘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보울러의 제안입니다.
자기계발서가 늘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자기계발이 전제하는 '노력하면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하면 더 나아진다'는 명제가 삶의 모든 국면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나의 노력이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불확실함 속에서도 스스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라야 성장이라는 서사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목적 괴물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측면을 담담히 마주할 수 있을 테고요.
이번 주 유료 뉴스레터에서는 위 글에 더해, 누군가와 진짜로 '같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치료적 현존 연구를 통해 들여다본 글과, 임상심리전문가가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며 발견한 불확실함과 명료함의 관계에 대한 글을 함께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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