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5월에 고기능 우울증 개념을 제시한 주디스 조셉 박사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뉴스레터를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작년 11월에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제목으로 조셉 박사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해서 이번에 읽어 봤습니다.
저자는 고기능 우울을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무쾌감, 마조히즘, 트라우마입니다. 특히 트라우마로 인한 정서적 어려움을 끝없는 성취로 덮어버리려는 경향을 설명하며 이에 무쾌감이 수반되는 양상을 고기능 우울증으로 개념화합니다.
고기능 우울증을 앓는 이들은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정서적 고통을 생산성으로 전환한다. 그들은 병적일 정도로 생산적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트라우마는 그 범위가 너무 폭넓습니다. DSM 진단 체계에서 말하는 외상보다는 이혼, 따돌림, 실직 등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사건까지 포괄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경험한 모든 이가 과도한 성취 지향성을 보이며 무쾌감을 수반하는 고기능 우울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근거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주디스 조셉 박사가 책 출판 직전인 2025년 2월, 자신의 클리닉에서 자체 개발한 척도로 120명을 조사해 트라우마와 우울, 우울과 무쾌감의 상관관계 정도를 살펴본 논문을 한 편 발표한 것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고기능 우울증에서는 대중이 자신의 상태를 자가진단할 수 있게 고기능 우울증 척도와 무쾌감 척도를 각각 제시하는데 아마도 위 논문에서 사용했거나 살짝 변형한 척도인 것 같습니다. 재미로 해봤는데 저도 16개 무쾌감 관련 문항 중 4개에 해당하여 경미한 무쾌감증이 시사되네요.
이런 책은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더 많은 대중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는 몇몇 개념을 획득할 수 있게 돕는다는 점이 특히 큰 장점입니다.
신체적인 증상을 경험할 때 그 원인을 모르면 불안이 고조되지만 원인을 알면 치료 및 대처 방법이 명확해질 가능성도 높은 만큼 불안이 완화됩니다. 내 마음 상태를 개념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다는 것 또한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있습니다. 이해가 불안을 완화하지만 실제 치료로는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고기능 우울증 개념을 알게 됨에 따라 어느 정도 내 안에 통제감이 생기는 만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인식으로까지 이어지며 딱히 정신건강 서비스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에는 DSM-5에 수록된 주요우울장애나 지속성 우울장애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에도 스스로를 고기능 우울증으로 자가진단해 버릴 여지도 없지 않습니다.
학술적인 엄격성을 따지는 만큼 대중과는 멀어질 가능성이 높고, 저조한 책 판매 실적은 저자도 원하는 바가 아니기에 심리학 대중서는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법한 다소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기능 우울증 같은 모호한 개념은 학술적으로는 마이너스지만 대중이 서로 소통하는 데 있어서는 유용함을 지니기에 무조건 평가절하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소통이 오가다 보면 집단지성에 힘입어 개념적인 엄밀함을 추구하려는 일련의 흐름도 어딘가에서 형성될 여지가 있어 보이거든요.
그리고 이런 유의 책은 보통 개념 제시로 자가진단해 볼 수 있게 도운 다음 대처 방안까지 연결하는데 이 부분이 실용적이라고 느낍니다. 74회차 유료 뉴스레터에서 다루었던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에서도 '초예민자는 결혼을 한다면 어떤 특성을 지닌 사람과 해야 할까'와 같은 구체적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더군요.
고기능 우울증에서도 5V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Validation(타당화), Venting(환기), Values(가치) 등입니다. 타당화는 과거의 상처와 지금의 고통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환기는 안에 쌓아둔 답답함과 불안한 에너지를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글쓰기 등을 통해 밖으로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가치는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각각의 접근은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으로서 근거가 비교적 탄탄한 것들입니다. 타당화의 일환으로 스스로의 감정에 이름 붙이는 작업이 감정조절을 돕고, 표현적 글쓰기와 같은 환기 방식이 외상적 기억에 수반되는 괴로움의 완화를 도울 수 있습니다. 수용전념치료에서는 고통 속에서도 가치에 입각하여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요.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처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중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고, 고기능 우울증 같은 책의 장점은 그 도구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도구가 내게 맞는지는 써봐야 아는 것이기에, 고기능 우울이든 초예민자든 자신이 그 컨셉에 해당한다 느껴지면 책에 제시되는 다양한 대처 방법 중 무엇이 자신에게 유용한지 이것저것 시도해 보며, 스스로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것저것 시도해 봐도 나아지지 않거나, 특히 잠과 식사처럼 기본적인 일상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책을 덮을 때입니다.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개념이 누군가에게 상담실이나 진료실의 문을 두드릴 용기를 북돋울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듯합니다.
잔향 심리학 뉴스레터 | 발신자: 오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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